[동물변인] 一番變人 : 바퀴벌레(蜚)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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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눈앞이 점멸한다. 뒤통수가 징징 울리고 마치 깨진 것마냥 무언가 유체가 들락날락거리는 감각이 휘몰아친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떠오르지 않는다.

“…뮤?”

“……뮤?”

뭐야 방금 그 귀여운 소리는. 여자애?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자애는 누구일까……?

“…….”

알몸……. 봉곳한 가슴 봉우리 각 중심에 돋아있는 핑크빛 돌기. 귀엽게 생긴 배꼽. 가느다란 허리를 위시한 군더더기 없는 몸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골반 밑으로 쭉 뻗은 다리. 무엇보다도, 빨려들어갈 것 같은 까만 눈동자와 긴 속눈썹, 그리고 오똑한 코가 매력적인 귀여운 얼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윤기나는 검은 머릿결…과, 머리 위로 곧추세워진 두 개의 가느다란…무언가. 검은색인듯 하면서도 약간의 움직임에 받는 빛의 양이 달라지니 회색빛을 띄는 것 같기도 한 그것은…뭐야?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자애. 갸웃하는 동시에 머리 위의 두 실선이 흔들. 가슴도 흔들…….

“누, 누구야!?”

“뮤앗?!”

으윽!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더니 뒤통수의 지잉거림이 미간으로 용오름쳐 오른다. 하얀 바탕 위로 얼룩덜룩 변해가는 시계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발뒤꿈치로 부드럽게 으스러지던 어떠한 감각.

……어느 쪽 발꿈치였지? 왼쪽? 오른쪽??

굉장히 찜찜해진 마음에 양쪽 모두를 살펴봤지만 벌레 시체처럼 생긴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가슴 한편에서 거짓된 기억이 아니라며, 시체를 찾기 전까진 제정신으로 돌아올 생각일랑 말라며 점차 심박수를 높여간다. 하지만 침대 옆으로도, 그 밑으로도 벌레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논점을 다시 현재로 돌려보자.

“…누구나, 넌.”

만두만 십수 년 먹어봐야 나올 수 있을 법한 비장함을 두르고 눈앞의 비정상적 존재─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치녀라면 충분히 비정상적인 존재 아닐까?─에게 명대사를 날렸다.

“뮤, 뮷! 뮤으으……!”

하지만 돌아온 말은 대답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아까부터 뮤 뮤 거리는데 뮤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뮷!! 뮤뮤뮷!!”

그 말에 열 좀 뻗쳤는지 불같이 반발하는 여자애, 음, 그 실체적 볼륨감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본의 아닌(?) 나의 음흉한 시선이 가슴에 머무르자 오한이 들었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녀석.

아차, 잠시 넋을 놓고 봤지만 우선 몸을 가려주는 게 배려라 부를만한 것이겠다. 이제 막 2월에 들어선 이곳의 날씨는 정말 봄이 오긴 할까 싶을 정도로 쌀쌀한 공기만이 온종일 이어지고 있으니까.

언제 또 생생한 여체를 볼 수 있으랴 싶은 욕망을 이성으로 억누른 채 옷장에서 반팔 한 벌을 꺼내어 뒤로 휙 던졌다. 최대한 알몸을 보지 않기 위한 나 나름대로의 배려다.

곧이어 무언가에 먹히는 듯한 ‘뮤앗’ 소리와 찰싹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아.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다음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구나.

“뮤, 뮤아앗!!!”

“잠, 잠깐!!”

쿵!

─또 뒤통수가 바닥과 부딪쳤다. 그래도 이번엔 옷장 서랍에 있던 반팔을 꺼내기 위해 앉은 자세로 있던 점도 있고, 무엇보다 화를 낼 게 분명하다는 심적 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충격을 완화할 준비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내 위에 올라타선 열심히 버둥버둥, 온몸 구석구석을 때리는 녀석. 하지만 사람을 때리는 데에 익숙지 않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힘이 약한 건지 이따금 갈비뼈 같은 급소에 공격이 들어가는 걸 뺀다면,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어느 정도는 참아주자는 마음이─

퍽!

─있었던그는소중한부위에의충격에그만정신을잃고싶어졌다.

다 못 삼킨 숨이 폐부를 빠져나가고 비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입을 쩍 벌리고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충격에 경련하는 나를 보아라. 그런 나를 보고도 여전히 투닥투닥 치부를 가릴 생각이 없나 개념이 없나 구타에만 열중하는 치녀를 보아라.

“작작 좀 해라!”

턱.

대가 끊길 뻔한 분노를 끝내 참지 못하고 날 때리던 양팔 두 손목을 붙든 뒤 몸을 일으켜 마운트를 취했다. 이로써 형세 역전이다.

“뮤, 뮤으으읏……!”

겁을 먹은 건지 아직 분이 덜 풀린 건지 애써 버둥거리는 녀석. 똘똘이에 두번째 안부 인사는 받고 싶지 않았기에 두 다리를 철저하게 봉해둔 상태이다.

제삼자가 본다면 나더러 강간범이라 소리칠지도 모르는 광경. 의도한 바는 아니나 물리적 피해를 최소화하려던 나의 노력은 그 정도의 야릇한 자세로 드러나 있었다.

외모만큼은 천사처럼 어여쁜 여자아이. 다시금 생각해보지만, 주변 아무것도 없는 곳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내 밑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을 텐데도 여전히 반항을 멈추지 않는 이 변태 치녀는!

“야, 그…이상한 짓이라든가, 아무튼 괴로운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봐.”

“……뮤, 뮷!!”

내 목소리에 녹아든 피로를 느껴준 걸까, 그제야 반항을 멈추고 고개를 휙, 옆으로 돌려버리는 녀석. 얼굴이 붉은 건 아직 분이 덜 풀린 걸까?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움직임을 멈추었으니 일단은 수긍의 표현이라 생각하자.

“…….”

두 손을 풀어주고 급소를 방어하며 조심스레 뒤로 물러나자 마찬가지로 조심스레 뒤로 물러나는 녀석. 쟤는 내 말을 이해하는 것 같은데 정작 내쪽에서는 이해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당장의 대치 상황만큼은 끝났음에 한숨을 푹 쉬자니 어느새 나는 일어나서 책상을 향해 가고 있었다.

“……?”

─내가 왜? 내 손에 들려있는 작은 책은 무엇이고 나는 왜 책상 앞에 와있는가? 나는 왜 펜을 들고 표지 우측 하단의 공간에 내 이름 석자, ‘신 래 문’을 써내리고 있는 것인가?

“……어?”

뭐지? 지금 뭐지? 의식은 멀쩡히 존재하는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몸뚱아리. 지금은 또 내 의사대로 움직이지만, 방금은 결단코 아니었다.

방금 그건 내 의지대로 이뤄진 행동이 아니다.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고,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이런 행동을 하고자 한 적이 없다. 내가 이 상황에 무슨 이유로 책에 이름을 기입해두겠냐고. 그보다 내가 이런 책을 구입한 적이 있던가?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한 것 같은 기이한 경험이 무척이나, 기분 나쁘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내용이 없는 공책이잖아.”

방금 이름을 적어놓은 책의 내용물은 그저 백지뿐인,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책이었다. 붉고 두툼하여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표지가 아까울 정도로 내용물이 없었다.

음. 탐탁지 않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슬슬 머리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바퀴 보고 놀라 쪼그라든 내 가슴, 잇따른 불가사의에 수축하다 못해 터져버릴 것만 같구나.

“야!”

─누구냐?!

홱─목에서 빠득, 하는 소리가 동시에 터지고─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내 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애와 나 단 둘 뿐이다. 고운 우리말이 들리기에 돌아본 자리엔 아까의 말이 통하지 않는, 뮤뮤 소녀 뿐이란 말이다.

대체 누구지? 또 다른 사람이 숨어들어온 건가? 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상체를 기울여 침대 밑을 살펴보아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리번거려봐도 이 공간에는 숨을 곳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옷장은 아니지, 옷장은.

“나야, 나!”

그리하여 다시 시선이 향한 곳은…입을 뻥긋할 때마다 활자가 들려온 알몸의 여자아이, 뮤뮤 소녀 아닌가?

“…네가?”

“그래, 나쁜 놈아!”

나를 노려보며 기세등등하게 알몸을 내보이는 녀석.

정말 고맙다. 네가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나도 당당히 볼 수 있어 고마워. 그렇지만 하나 물어봐야 할 것이 생긴 것 같다.

“방금까지는 뮤뮤 거리더니, 지금까지는 말하지 못하는 척 했던 거야?”

“나도 몰라.”

본인이 모른다면 누가 알 수 있을까? 정신이 아득해지는 답변을 듣고 아직까지 통증이 다 가시지 않은 뒤통수가 다시 아려왔지만, 우선 거기에 일조하는 원인부터 처리하고 보자.

“그, 일단 말이 통한다는 걸 알았으니 하나만 부탁하자. 내가 준 옷 좀 입어줄래?”

아래 위 두 곳으로 몰린 혈액을 온몸에 퍼트리지 않는다면 신체 말단이 썩어들어갈 것만 같거든.

“왜? 이런 거추장스러운 걸 왜 입어야 해?”

퉁명스레 반문해봐야, 내 본능의 하울링에 이성의 끈이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라 답해주면 좋을까? 하지만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돌려서 말해봐야 이해할 것 같지도 않네.

“입으면 따뜻해져.”

내 시선 때문만은 아니었는지 아직까지도 몸을 떨고 있는 게 보인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람의 말로 이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인간은 맞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추위에 몸을 떠는 것도 당연하고, 감기에 걸릴 가능성 또한 있다.

“……너, 나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지?”

이런! 확실히 여자의 감이라는 건 무섭군!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심리를 읽혔다.

“너…나에게 한 큰 잘못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

“미안한 얘기지만, 모르고 있어. 아니, 네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겠거든.”

즉시 솔직한 심정으로 답해줬다. 굳이 숨길 일도 아니고, 숨겨봤자 득이 될 일도 아니니까.

내 즉답에 움찔하더니, 잠시간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하다.

무엇을 생각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 표정을 읽기에는 내 시야각이 넓은 관계로 집중이 흩어지고 만다. 빨리 입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가벼운 기대를 짓밟고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떼는 녀석.

“난, 네가 밟아서 죽을 뻔한─바퀴벌레야!”

“……뭐?”

…그건 너무나도, 아연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바퀴벌레?”

잠깐, 잠깐만. 이건 내 현실을 인지하는 감각이 무너져 붕괴했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녀석이 이상한 말을 내뱉은 게 아니라 내 머리가 그 말을 이상하게 알아먹은 걸지도 모른다.

바퀴벌레가, 사람이 됐다고? 농담이지? 말이 안 되잖아!

아니, 아니지. 근데 은근히 설득력이 있는 게, 저 더듬이 같은 걸 보라고. 머리카락이 뻗쳤다기엔 하필이면 단 두 가닥뿐이고, 그마저도 특수한 머리띠를 착용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확실히 머리카락이라기엔 미묘하게 굵은 느낌인데, 저게 진짜 더듬이라면 바퀴벌레라고 주장하는 걸 믿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아니, 래문아, 지금 논제가 어긋났어! 다시 돌아가자. 잠깐, 잠깐만. 이건 내 현실을 인지하는 감각이─아니, 이건 너무 돌아갔고.

바퀴벌레가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대체 어떻게? 일반적인 과학 상식으로도 말이 되질 않잖아. 바퀴벌레의 유전자와 사람의 유전자에는 수많은 차이가 존재할 뿐더러, 종 자체도 이미 틀린데? 하다못해 질량보존법칙은? 아까 보니 날 덮쳤을 때 느낀 거지만 바퀴벌레의 질량이 아니더만?

“…….”

“…….”

“…있잖아.”

“왜.”

가슴을 흔들며─아니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자꾸 저렇게 보여주는 걸 나더러 어떡하란 말인가!─내게 톡 쏘아붙이는 녀석.

“혹시…네 더듬…이? 그걸 만져봐도 될까?”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안 돼!”

수락을…엥?

“더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잘못되면 책임질 거야?”

“…하하, 참. 그럼 뭐야, 너. 진짜 바퀴가 사람이 됐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진짜라니까?”

답답하다는 듯 언성이 높아지는데, 답답한 건 이쪽도 매한가지거든.

“미안하다고 안 해?”

“잠깐, 잠깐. 제발 내게 잠시간만이라도 이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적응할 시간 좀 주겠어? 미안하다는 말은…그래, 미안해. 그러니까…잠깐만 생각할 시간 좀 줘.”

“…….”

마음에 들진 않지만 사과는 사과라는 듯 시원찮은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녀석. 고맙다. 슬슬 뒤통수 통증도 가셨으니 지금까지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정리해보자.

이곳에 이사를 왔고, 어마마마에게 무엇이든 요청권을 썼는데도 거절당했고, 그냥 침대에 드러누워 고통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 했더니만 바퀴벌레를 보고 대경실색하여 바닥으로 뒤통수부터 다이빙했지.

이후로 정신을 차려보니 이 녀석이 있던 건데…그럼 지금의 상황을 기절한 내가 꾸는 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거 참 고통이 생생한 루시드 드림이 아닐 수 없구만.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꿈이라고 현실을 부정해봐도 지독하리만치 생생한 감각이 그것을 부정한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겹치고 겹쳤지만, 어찌 됐든 내가 살아가고 있던 현실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

아, 그렇다면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나는 이 녀석을 어떻게 대하면 좋은 거지? 좀 더 날 것의 표현을 하자면, 얠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냐?

머리를 긁적이다 못해 아주 피부를 까낼 정도로 벅벅 긁는다. 답답한 심정에 무심코 저지르고 마는 일종의 자해행위지만, 한편으로는 머리가 시원해지는 감각에 의외로 정신이 맑아지는 효과가 있다.

“…좋아. 그럼, 네가 실제로 그 바퀴벌레란 말이지?”

“그래!”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하는 녀석. 여전히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내 입에서 나오길 바라는 말이 있는 것이겠지.

“……미안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너를 보고 놀라 벌어진 일이니 네 잘못이 더 크다─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만, 일련의 사태를 내가 발을 헛딛었다는 실수에서 벌어진 일이라 본다면 사과해야 할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으로 녀석의 기분을 풀 수 있다면 값싼 것이다. 앞으로 대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해나가야 하는데 지금처럼 가시 돋친 반응만 돌아온다면 서로 피곤해질 따름이니까.

“그럼 됐어. 그거, 엄청 아팠지만…난 지금 살아있으니까. 말을 전할 수 있었으니 족해.”

그래? 아까부터 기분 나쁘다는 오라를 풀풀 풍기던 것치고는 의외로 깔끔하게 털어내는 성격인가 보다. 방금까지만 해도 공격적이었던 태도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아 다행이네.

그럼 기분도 풀렸을 테니까 한 번 더 부탁해보자.

“이제 화가 좀 풀렸다면 부탁이니까 내가 준 옷 좀 입어주겠어?”

재차 강조하지만 내 앞의 여자아이는 위에도 아래도 아무것도 걸친 게 없는 알몸이다. 가슴만 놓고 말해봐도 유방, 유륜, 유두,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알몸.

“나 이거 입기 싫어.”

허허, 그렇게 오들오들 떨면서도 입기 싫다고 말하는 까닭이 대체…아차. 직전까지 바퀴벌레였던 존재가 인간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 리가 없지. 음…어쩔 수 없다. 똑똑히 들어라, 바퀴.

“옷이라는 건 말이지, 음…우선 몸을 외부의 위협요소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입는 것이 가장 주된 목적이야. 지극히 당연한 탓에 잊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길어. 간단하게 해줘.”

에라이!

“간단히 말하자면 안전성과 보온성과 통풍성과 자주성과 차별성과 통일성을 위함이다!”

“뭐, 뭐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짓는 녀석.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인석아.

“방금 한 말은 일반적으로 입어야 하는 이유야. 그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이유는, 남자나 여자나 서로 알몸을 쉬이 보여선 안 된다는 윤리에 관한 것이고.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행위이고, 동시에 본능을 억누르는 목적이자 일종의 보호수단으로서 입는 것이지.”

“……?”

장황하지만 그만큼 강조하고 싶었던 내 말을 들은 녀석은,

“그러니까…남자 여자 잘 모르겠지만…네가 위험하니까 입으라는 거잖아?”

…윽! 그렇다. 생각해보니 방금 한 말은 내가 스스로를 변태라고 밝히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치만 사실인걸! 일반화한다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세상 모든 남자들은 하나씩 음흉한 마음을 품고 사는 동물인걸! 나만 그런 게 아닌걸!!

“…응. 은은히…체취가 남아있긴 하지만, 불편하지 않아. 입어달라고 부탁하니까 입어줄게.”

맙소사. 방금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겠지? 내가 던져줬던 옷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쉬는 녀석.

그 행위가, 더없이 야릇하게 느껴진 건 내가 남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어찌하여 그토록 그윽하게, 묘한 기분이 들도록 색(色)을 띄우는 거야?

끙끙거리며 잘못된 구멍으로 팔을 내뻗는 모습도, 앞뒤를 거꾸로 입은 모습 하나하나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마치 첫눈에 반한 것 같은 두근거림.

─그런 생각을 하고 만 내가 밉다.

“후아. 뭐야, 이거. 엄청 입기 어렵고 답답해.”

“…….”

“……뮷? 왜 날 그렇게 쳐다봐?”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던 친구와 외부의 압력으로 이별한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래문 네 녀석은 처음 보는 여자애가 알몸이었다는 사실로 이토록 가슴을 두근거리는 거냐?

어이, 바퀴벌레라고 주장하는 너. 왜 널 뚫어져라 쳐다보냐고 물었지? 정말 한스럽고 줏대 없는 내 가슴에 무언의 질타를 쏟아붓고 있어서야.

아무리 본능적인 생리현상이래도, 자괴감이 들고 만다.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다시 처음 했던 얘기로 돌아가자. 네가 바퀴벌레에서 인간이 되었단 말이지?”

“몇 번을 말해? 네가 날 밟아서 짓이겼…….”

잠깐! 널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현상보다 그 점이 더 기이하다고.

“짓이겨졌다는 녀석이 어떻게 멀쩡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아악! 너도 답답하지?! 근데 진짜 답답한 건 이쪽이라고!!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면 천장에 구멍이 있어야 하고, 밑에서 튀어나왔다면 바닥에 구멍이 있어야 하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내 방에 있는 하나뿐인 열쇠를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었냔 말이야? 물론 어마마마에게도 스페어가 있지만, 모르는 알몸의 여자애에게 그걸 넘겨주실 만큼 비상식적인 위인은 아니시니까!

“그래, 좋아. 다 좋다 이거야. 이미 사과도 했지만, 네가 바퀴벌레였다는 걸 분명하게 인정할게. 그렇다면 하나만, 내 소원을 들어주라. 네 그…더듬이? 그것 좀 만져보게 해주라.”

“왜 그렇게 집요하게 더듬이 만지려는 거야?!”

오오, 더듬이로 보여지는 것을 곧추세우며 화를 내는 녀석. 저렇게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머리카락과는 다른 신체의 일부가 맞는 듯하다.

저렇게까지 싫어한다면 억지로 만졌다간 화만 부를 것 같고, 이래서는 얌전히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네. 녀석이 바퀴벌레가 맞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으니 더듬이를 만져보겠다며 질척거리는 건 악수다.

“음…….”

자, 이로써 문제가 생겼다. 아니, 모든 게 다 문제투성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순응했으니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냐? 한 집에 같이 산다는 것도 문제고, 맨몸으로 쫓아내기엔 도의적인 책임 소지가 있는데.


기존 연재분을 두 편씩 합쳐서 작성하는 게 어느 정도 분량이 나와줘서 괜찮네요. 끊는 부분도 적당해지고. 이번 편은 20kb가량의 분량으로 작성했습니다. 보통 인터넷 연재분이 이 정도 분량이라는 듯한데, 다들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기존 내용을 10~20% 정도 베이스로 삼아 작성하는데도 2~3시간이 걸렸는데 말이죠. 과거의 저는 생각나는 대로 쓱쓱, 제 세계를 그대로 그려나갔기에 20kb도 1시간이면 뚝딱 써내렸지만, 지금의 제게는 어려운 일인 모양입니다.

그보다, 이번 편에서는 기존 소설에서 빈약했던 부분이나 불필요한 부분에 대한 꽤 큰 수정이 있었습니다. 가는 길은 똑같지만 진입 각도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이것도 썩 마음에 드는 수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설정 하나를 통째로 드러낼 것까지는 아니었기에 놔두었습니다.

이제 다음편, 드디어 다음편입니다. 진정한 작품의 시작을 그려낼 차례입니다. 분량을 어떻게 조절하면 좋을지 고민중인데, 적당히 더하고 덜어내는 시행착오를 겪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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